[대한민국 1세대 남성 디자이너 ‘손일광’의 거꾸로 가는 시계] ‘패션과 예술’ 살아 숨쉬는 ‘명동 전성기’ 활짝 열려
[대한민국 1세대 남성 디자이너 ‘손일광’의 거꾸로 가는 시계] ‘패션과 예술’ 살아 숨쉬는 ‘명동 전성기’ 활짝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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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수출부흥을 모토로 대한민국 제 1회 무역박람회가 구로 공단에서 열렸다.한국 최초의 무역 박람회인데다 의상 컨테스트가 열려 주요언론들의 관심이 집중되던 때였다. 그때 손일광 디자이너는 의상컨테스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게 된다. 박람회에다 의상컨테스트라는 당시에는 초유의 일들이어서 언론에 바로 기사화됐다.

시골에서는 신문을 보고 어머니는 물론 친척들에 이르기까지 “성공해 줘 고맙다”며 축하를 아끼지 않았다. 의상디자이너라는 분야도 생소했고 더군다나 명석한 화공학도로 기대를 모았던 청년이 ‘남자 디자이너’의 길을 가게 된 것에 대한 의구심이 해소되는 계기였다.

故최경자 선생이 1990년 발간한 ‘패션과 함께 한 나의 사랑’이란 책자에서 제자 손일광에 대한 애정이 느껴진다. 1964년 국제복장학원을 졸업한 제자 손일광에 대해 최경자선생은 이와 같이 기억했다.

“학원초기에 입학해 신선한 매력으로 즐겁게 했던 손일광은 키도 크고 잘 생긴 미남학생이었다. 성격도 매우 활달하고 속이 트여 상대방을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이다. 분위기가 서글서글하고 개방적인 그는 도무지 어떤 틀이나 형식에 매이는 것을 싫어하고 자유분방하게 자기 재능을 발휘하여 타고난 예술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재능 또한 얼마나 다양하고 무궁무진한지 재간꾼으로서의 그의 샘물은 마를 줄을 모르는 듯하다. 거기에 재치와 기지까지 번득여 손일광의 기발한 아이디어는 늘 즐거운 충격을 주곤했다...”

전편에도 소개했듯이 충무로에서 처음으로 가두 패션쇼를 열어 수많은 인파로 들끓게 했던 손일광 디자이너는 최경자 선생과 단순한 제자와 스승 그 이상의 존경과 신망을 가졌던 것 같다. 항상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 그가 최경자 선생에게 결혼식때 주례를 부탁한 것이다.

이로인해 최경자 선생은 아직까지 유교정신이 팽배했던 대한민국 사회에서 한국최초의 여성 주례로 역사에 남게 됐다. 신랑인 손일광은 스승인 최경자 주례선생앞에서 노타이 차림의 나름대로(?) 예복을 입고 결혼식을 했다. 하객들이 의아해 할 시간도 없이 대한민국 최초의 가장 스피디한 주례사를 통해 ‘형식적 지루함’을 해소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무역박람회 의상컨테스트 최우수상
‘패티김·길옥균’ 웨딩 디자인 맡아
군대서 날아온 ‘최복호’의 팬레터


패션쇼를 해프닝으로 만들어 전위작가로 손꼽힌 손일광 디자이너는 삶 자체가 ‘아방가르드’ 했던, 주변의 모든 것들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능력의 소유자였다. 최경자 선생은 제자들을 회고하는 책자를 통해 “샘물처럼 솟구치는 지기와 재치로 예술가답게 자기 생을 사는 손일광의 눈부신 감각들이 다시금 멋지게 정련돼 큰 빛을 발하기를 기대한다”고 제자에 대한 애정과 기대감을 표현했다.

1968년은 손일광에게 의미있는 해이다. 의상컨테스트 최우수상 수상과 함께 개인 부티크 ‘A.G’의상실을 열게 된 해이기도 하다. 의상실 A.G는 ‘아방가르드’를 의미했다. ‘남다른 길’ ‘남이 하지 않는 일’을 하고자 했던 디자이너 손일광의 열망을 표현했고 또한 한국미술사에 큰 획을 긋는 ‘4집단’의 산실이 됐다.

‘4집단’창단은 한국미술사 뿐만이 아니라 당시 ‘생각하는, 행동하는 젊음’에 대한 사고를 뒤흔들어 놓는 일대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는 만큼 다음편에 자세하게 연재하고자 한다.

손일광 선생은 종종 자신을 ‘어벙이’라고 표현하곤 한다. 자신의 유명세를 제대로 활용하겠다는 생각도 없었고 부를 축적한다든지, 이익을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하는 것도 몰랐다고 한다. 손일광 디자이너는 큰 화제몰이를 했던 ‘패티김과 길옥균’의 결혼을 위한 웨딩드레스를 만들었다.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를 위한 웨딩드레스와 네벌의 화동드레스를 디자인했던 그였지만 대외적인 홍보는 커녕 사진조차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입소문은 빨랐다. 멋을 아는 여성들의 발걸음이 의상실 A.G로 이어졌다.

손일광 선생은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에는 서울에서 잘 산다는 사람들이 명동에 와서 옷을 맞춰 입었습니다. 요즘과는 달리 결혼식때 제일 부러움을 사는 대상이 옷을 많이 해 가는 사람이고 그 다음이 아파트 열쇠였을 정도니까요. 외국패션잡지를 보고 그대로 맞춰 달라는 사람, 대학교 입학과 졸업때 부모와 함께 옷을 맞춰 입으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저렴한 기성복 캐주얼이 없었을 때여서 명동패션은 전성기를 누렸습니다.”

디자이너 손일광은 디자이너로서 예술가로서, 때로는 ‘괴짜’로 불리며 각종 신문과 잡지 등 언론에 이름을 올리며 유명세를 치렀다. 당시 매스미디어가 오늘날처럼 발달하지 않아 잡지를 통해 기사를 접한 독자들이 일명 ‘팬레터’를 보내오는 경우가 많았다. 연예인도 아닌데 ‘팬레터’라니... 그 중에는 담양에서 대나무를 깎는 아가씨가 “디자이너가 뭔가요? 어떻게 하면 디자이너가 될 수 있나요”라는 편지도 있었다. 디자이너 최복호와의 인연도 이렇게 시작됐다. 군복무중이던 군인 ‘최복호’에게서 편지가 날아들었다. “선생님, 남성디자이너가 되려면 어떻게 하면 되나요?” 하고 말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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