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로 멘디니 ‘거인의 두상’
시대를 반영하는 거장의 작품
기후위기·AI 시대 디자인 역할은?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뮤지엄 둘레길은 지하 2층에서 지상 4층까지 계단 없이 굽이굽이 돌아 총 533미터를 오르내리는 멋진 회랑이다. 벽면은 화려한 작품 설치가 어울리는 흰색이다. 이 둘레길 3층 벽면에 올여름 내내 100마리의 녹색 돌고래가 걸려 있었다. 환경디자이너 윤호섭 교수(1943~ )의 그린캔버스 전시 주제 작품이다.
제주남방큰돌고래 실물 크기 그림에는 녹색 친환경 페인트와 친환경 천이 사용되었다. 전시장을 찾은 시민들이 간혹 그림을 구매할 수 있느냐고 묻는데, 아쉽지만 살 수 없었다. 전시가 끝나면 모두 제주도에서 돌고래 보호 활동을 하는 환경단체 핫핑크돌핀스 팀에게 기증된다.
윤호섭 교수는 2002년부터 지금까지 시민들이 가져온 흰색 티셔츠에 돌고래와 나뭇잎 등 자연을 느낄 수 있는 디자인을 그려주고 있다. 나뭇잎 디자인은 어느 초등학교 환경 수업에서 비롯되었다. 담임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장 지오노의 동화 ‘나무를 심은 사람들’ 전문을 한 학기 내내 깨알같은 필사로 완성하는 학생들에게 감동받아 나뭇잎을 그리기 시작했다.
구제역으로 수많은 돼지와 소들이 땅에 묻히던 2010년에는 승리의 V자를 그리는 인간의 팔뚝 아래에 돼지코 모양을 붙인 입체조형물을 만들기도 했다. 인간 문명의 우월함은 사실상 자연과 동식물의 죽음 위에 쌓아 올린 우울한 승리임을 상징한다.
전시장 바닥에 설치된 볼링 레인 위로 굴리는 공은 윤 교수가 수십 년 동안 모은 택배 박스 포장 테이프를 뭉친 덩어리이다. 볼링 레인을 살짝 걷어내면 그 아래에 거대한 포스터가 깔려있다. 총포와 칼 등 살상 무기들로 디자인된 길이 13미터의 거대한 토마호크 미사일 그림이다. 그 밑에는 핑크색 하트로만 구성된 그림이 있다. 그림을 걷어낼 때마다 하트와 미사일의 실루엣이 겹치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한다. 누구나 한 번만 봐도 감탄하는 직관적 디자인이다.
역사적으로 남북분단이라는 유사한 경험을 가진 베트남과 한국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는 포스터도 출품되었다. 한반도 면적의 약 1.5배인 베트남 지도를 옆으로 뉘여 한반도 모습으로 점점 작아지도록 해서 베트남과 한반도를 같이 연상케 했다. 포스터 한쪽 구석에는 베트남어로 쓴 작은 쪽지가 붙어있다. 양국의 슬픈 역사가 떠올라 어느새 눈물이 났다는.
그린캔바스 전시가 끝나는 지점에 서면 거대하고 화려한 조형물이 기다린다. 유니크한 디자인으로 유명한 알레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 1931~2019)의 유작 ‘거인의 두상’이다. 작품명에서 유추되는 디자인 모티프는 칠레 이스터섬의 거대한 석상 ‘모아이’다.
대략 13세기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모아이 석상 재료는 제주도 돌하르방과 같은 현무암이다. 현대인이 조각했다고 해도 될 정도로 디자인이 모던하다. 어느 나라나 거석문화는 권력의 상징이자 사회경제적 결과물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스터섬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6백여 개 석상들이 정확히 한 방향만을 바라보고 서있는 것은 미래를 꿈꾸었던 당대인들의 염원일까?
원시사회로부터 현대까지 건축과 상품 등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물건과 서비스에는 그 시대의 생산력 수준과 사회경제적 배경이 들어있다. 석기시대 사람들의 생존은 누가 더 날카롭고 단단한 석기를 만드는 능력이 있는가에 달려 있었다. 청동기를 사용하던 부족들은 철검을 휘두르는 적들에게 무릎꿇었다. AI 시대에 사용할 제품의 편리성과 디자인도 그 나라 과학기술에 의해 결정된다.
120년 만에 최악의 여름 더위를 기록한 2024년, 위기의 기후재난 시대에 과연 우리는 무엇을 그려야 하고 어디를 바라봐야 할까? 한국의 윤호섭과 이탈리아의 멘디니, 두 거장의 디자인을 통해 모든 디자인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는 것을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