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어떤 소비자가 명품 브랜드 슬리퍼를 신고 나갔다가 발이 시커멓게 물들었다고 분노했다. 그는 SNS에 “비 오는 날 명품가죽 슬리퍼 신었더니 일어난 일” 이라며 여러 장의 사진을 공유했다. 사진은 검게 얼룩진 맨발 사진이었는데 “이건 너무 심하다. 5번 씻어도 안 지워진다. 10만원도 아니고 100만원짜리이다. 비 오는 날 신지 말라고 알려주었으면 좋았지 않았을까?”
어느 신문에 실린 내용 일부이다. 나는 이 기사를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그 기사에 달린 동조하는 수많은 댓글을 보고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지극히 상식적인. 물에 젖으면 가치를 상실하는 가죽
갑자기 비가 올 때 여성이 들고 있던 핸드백으로 비를 가리면 그 핸드백은 ‘짝퉁’이라는 우스개가 있다. 누구나 아는 이 농담 같은 얘기는 사실, 일격에 두가지 팩트를 관통하는 예지가 번득이는 블랙 유머이다. ‘비싼 가죽은 비를 맞혀서는 안 된다’ 는 사실과 ‘싸구려 가짜 가죽은 그래도 괜찮다’는 범세계적으로 통하는 상식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에르메스 백을 가장 많이 가졌다는 빅토리아 베컴이라도 버킨백으로 비를 가리지는 못할 것 같다. 단지 ‘비싼 가방’이라서 가 아니다. 가죽은 물에 젖으면 가치를 상실한다. 고유의 부드러움을 잃고 딱딱해 지기 때문이다. 가죽제품을 세탁기에 넣고 돌리면 재앙이며 그걸 모르는 성인은 없을 것이다. 고급가죽은 괜찮지 않을까? 아이들이 할만한 생각이지만 만약 실험을 했다면 엄마에게 등 짝을 세게 맞는 것으로는 부족할 것이다. 고급가죽이 비싼 이유는 비 맞고 땅바닥에 갈아도 될 만큼 물성이 강해서가 아니라 부드럽고 섬세하며 아름답기 때문이다.
"10만원도 아니고 100만원인데…"
자동차가 침수되면 가치를 상실한다. 아무리 완벽하게 재생되었다 해도, 단 1분이라도 침수되었다면 그 사실을 알고 자동차를 사는 바보는 없다. 어떤 제품은 절대 물에 젖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가치가 손상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멸실(滅失)된다. 그런 제품이 어떤 것인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벤틀리가 물속에 아주 잠깐 침수되었다 나왔는데 시동이 걸리지 않는다. 3억이나 주고 샀는데 이럴 수가 있나? 라는 불평은 아무도 하지 않는다. 페라리 든 티코 든 승용차는 침수되면 끝이다. 가격이 3백만원이든 30억이든 다르지 않다. 천연 가죽제품도 그중 하나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비 오는 날 신지 말라고 알려주시지”
“살아있는 고양이를 넣고 작동시키면 안 된다.”하고 소비자에게 경고하는 전자레인지 제품은 있을지 언정 “비 맞히거나 물에 빨면 안 된다.”라고 경고하는 가죽 제품은 결코 없다. 상식이기 때문이다. 바지를 살 때마다 서서 입을 때는 한발로 서야 한다고 알려주지 않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슬리퍼가 백만원이나 하는 이유는 비를 맞거나 물속에서 신을 수 있어서 가 아니다. 바로 가죽이기 때문이다. 합성가죽 슬리퍼나 우레탄 삼선 슬리퍼는 물속에 10년 동안 두어도 문제없다. 합성가죽은 젖어도 딱딱해 지지 않고 썩지도 않으며 결코 발을 검게 물들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수륙양용이 아닌 모든 자동차가 그렇듯, 천연가죽 슬리퍼는 애초에 물속에 잠기는 환경을 고려하여 설계되지 않는다.
“너무 심하다. 5번 씻어도 안 지워진다”
인간의 피부나 동물가죽이나 똑같은 콜라겐 단백질로 만들어졌다. 그러니 가죽을 염색한 염료는 사람 발도 똑같이 염색할 수 있다. 머리 염색약이 피부에 묻으면 잘 지워지지 않는 이유이다. 염색이 잘 빠진다고 툴툴거리는 한편, 너무 잘 된다고 동시에 불평하고 있는 어이없는 장면이다. 자신이 좋아해 구매했던 죄 없는 브랜드 제품을 학살하기 전에 스스로의 상식을 먼저 점검해야 하지 않을까?
가죽은 동물의 피부이다. 우리 피부가 언제나 부드러운 이유는 콜라겐 단백질과 함께 적당한 양의 지방이 있어서이다. 세수한 후, 피부가 거칠고 메마르는 이유는 물이 증발하면서 지방이 함께 빠져나가기 때문이다. 굳이 로션을 바르지 않아도 지방은 곧 보충되어 피부는 다시 부드러워진다. 하지만 가죽은 죽은 동물의 피부이기에 이런 복원 과정이 불가능하다.
가죽을 제조할 때 염색이나 가공을 위해 지방을 먼저 제거하는 데 가공 후 그대로 건조 시키면 가죽은 딱딱해 져 버리기 때문에 지방이나 오일을 다시 공급해야 한다. 이처럼 지방을 제거하고 다시 보충하는 ‘탈지(脫脂)’와 ‘가지(加脂)’ 공정을 무두질 이라고 한다. 제품 출하 후, 가죽이 물에 젖으면 건조하는 과정에 지방이 상실되므로 마른 나무처럼 뻣뻣해 진다. 죽은 피부는 저절로 지방이 보충되지 않으므로 가죽제품은 절대 물에 젖으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