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섬칼럼] 직원들에게 ‘저녁이 있는 삶’ 제공하라
10월이면 국내 대기업 신입사원 공채 모집이 절정을 이룬다. 대학을 졸업하는 사회 초년병들이 선호하는 대기업들은 이달부터 매주 필기시험을 치르고 일정에 따라 11월 중 수차례 면접을 거쳐 늦어도 12월초까지는 최종 합격자들을 결정하게 된다. 소위 ‘A매치’ 취업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올 하반기 대졸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상위 10대 그룹사들의 공채 인원은 약 2만명 안팎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구직자들이 대기업 공채에 집중하는 이유는 이들이 한국내 ‘좋은 직장’ 순위에서 첫손 꼽히는 곳들이기 때문이다. 기업의 안정성과 성장성, 윤택한 생활을 보장하는 높은 임금이 그 기준이다.
그러나 연간 35만명에 이르는 국내 대학 졸업자들이 연 수만명에 그치는 대기업에 모두 취직할 수는 없는 일이다. 청년 실질 실업률이 15%에 이르는 상황에서 이 같은 취업 전쟁은 그야말로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지고지난한 과정이 될 수 밖에 없다.
국내 섬유패션업계도 취업 시즌을 맞아 많은 기업들이 신입사원을 모집하고 있다. 과거와 달리 연중 상시 채용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지만 연 매출이 수 천억원에서 1조원에 이르는 선두권 업체들은 아직도 공채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좋은 직장을 판단하는 안정성과 성장성, 높은 임금, 이 3가지를 기준으로 우리 업계에는 얼마나 많은 좋은 직장이 있을까? 아울러 지표로 판단하는 좋은 직장의 개념에 더해 개인의 가치와 행복을 추구하는 ‘저녁이 있는 삶’을 보장하는 양질의 일자리는 얼마나 될까?
정확한 통계를 내는 곳이 없어 전체 규모를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저녁이 있는 삶’ 즉, 일과 개인의 행복을 병행할 수 있는 기업 문화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22시가 기본 퇴근시간이다. 욕설이 난무하는 군대문화가 있다. (경영진에게는) 바라는 점이 없다. 있다고 해도 바뀌지 않을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지 않아 퇴사율이 높다. 기본 12시간을 근무한다. 정시출근시키면서 정시퇴근은 왜 안되나.” “돈을 원한다면 지원하라. 하지만 삶의 질을 추구한다면 비추(추천하지 않음).”
매년 10월, 극심한 취업 전쟁 북새통
바늘구멍 통과하듯 극소수만 살아남아
높은 업무강도, 구시대적 조직문화 ‘섬유패션’
?업무 만족도, 타 업계보다 상당히 낮아
일과 개인 행복의 균형 중시해야
최근 취준생들이 회사를 선택할 때 반드시 참고한다는 모 소셜미디어 기업평가 사이트에 나와 있는 내용들이다. 여기에는 구타와 갈취가 횡행한다는 고발성 글들도 올라와 있다. 모두 현직에 있는 사람들의 평가다. 그런데 애들 노는 학교 뒷골목도 아니고…. 적어도 대학을 졸업하고 공채를 통해 선발된 지성인들이 일하는 회사에서 구타와 갈취라니? 얼마전 만난 한 섬유패션 기업 직원에게 물어봤다. 그는 “갈취는 부하직원의 영업비나 야근 수당을 부서장 또는 팀장이 전용해 쓰는 경우를 말한다”며 “많지는 않지만 실제 위압적인 폭력이 자행되는 경우도 본 적이 있다”고 전했다.
현직 섬유패션기업 직원들의 불만은 늦은 퇴근과 타 업종에 비해 낙후한 구시대적 기업문화에 집중돼 있다. 기자가 보기에도 우리 업계에는 야간 근무가 밥먹 듯 일상화 돼 있다. 우리와 시차가 큰 외국과 거래하는 기업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패션 업체들 역시 8시 이전 퇴근은 꿈도 못꾼다는 곳이 많다. 퇴근 시간을 앞당긴다고 출근을 오전 8시로 바꾸면서 퇴근은 여전히 밤 9시를 넘기는 기업의 사례도 목격했다.
이 같은 기업의 살인적 근무 강도와 상명하복의 수직적 문화는 이제 막 회사에 들어와 발전을 열망하는 직원들의 애사심을 갉아 먹는 주된 요인이다. 왜 이런 일들이 개선되지 않고 있을까?
국내 섬유패션 업계에는 유독 자수성가형 오너들이 많다. 동대문 시장에서 일어나 매출 1조가 넘는 대기업 반열에 오른 기업인의 성공스토리가 있는가 하면 몇 번의 실패를 딛고 4전5기한 오뚝이형 오너까지, 삼포세대(연애·결혼·출산 포기)를 외치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불어넣는 스타 기업인이 즐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게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오너’ ‘사람을 중시하지 않고 회사의 수익만 바라보는 경영인’이라는 꼬리표가 따라 붙는다.
‘지속가능한 회사 성장의 가장 핵심 요소는 사람’이라는 명제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반면 ‘저녁이 있는 삶’을 고려하지 않는 오너들이 딱 그만큼 많은 것도 현실이다. 내 회사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회사라며 목숨건 취업 전쟁에서 승리해 회사에 들어온 신입사원들의 똘망똘만한 눈망울이 이들 눈에는 안보이는 걸까?